박규리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박규리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신규라
제목: 여신의 시선
이해하지 못한다고 놓아버린다면, 읽었던 시간의 의미마저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의미를 해석해 낸다면, 무의미조차도 새로운 의미로 변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규라의 습관이었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견을 듣거나 반대되는 시각과 마주할 때면, 언제나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럴 수도 있지.”
옳고 그름을 재단하지 않았다. 의견에는 주석을 달지 않았고, 판단 역시 유보했다. 세상의 진리를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라면, 규라는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고 믿었다. 그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좋은 의견이네.”
친구들이 독서 모임에 내놓는 제안에도 그는 항상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규라가 만든 이 모임의 이름은 처음에는 '규라의 시선'이 될 뻔했다. 그러나 그는 고민 끝에 '여신의 시선'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단순히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닌, 내면의 깊이와 성찰로 '여신'이라는 별명에 부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임의 이름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탓일까, 학교의 남학생들마저 이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자 애썼다. 규라와 친구들은 고민 끝에 남학생도 받기로 했다. 비록 '여신의 시선'이라는 이름이지만, 이 모임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했다.
교내 남학생들이 여신의 시선 독서모임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규라와 친구들은 고민 끝에 남자 아이들도 받기로 했다.
비록 여신의 시선이라는 이름이지만, 꼭 여자만 받는 독서모임으로 운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규라를 보기 위해 가입한 친구들은 규라의 말에 충실히 따랐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독서량은 규라 못지 않게 많았다.
규라가 읽었다고 전해진 독서는 이미 학교 근처의 도서관에서 구할 수 없는 서책이 되었다.
그렇게 학창시절을 책을 읽으면서 보낸 규라였다. 그러나 그런 규라에게도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책을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었다. 남들보단 월등히 많은 책을 읽긴 했지만, 대학교 진학이라는 높은 장벽을 넘기 위해 수능을 준비해야 했던 건 규라에게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나중에 다 읽어야지.”
그렇게 읽지 못한 책들, 그러나 읽고 싶은 책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읽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대학에 가면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목록을 정리한 규라였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도 목록에 책의 이름만 더해질 뿐이지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책만 집중해서 볼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대학에서는 고등학교보다 더 치열하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했다. 방학 때도 여러가지 취업을 위한 각종 자격증과 사회활동을 해야 해서 책을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엇던 규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항상 갖고 다니는 규라였다. 규라 자신에게는 책을 읽는 시간이 부족했지만, 평균의 관점으로 봤을 때 규라는 아직도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있었다.
그렇게 노력하던 규라에게 마침내 신입사원이라는 새로운 신분이 생겼다. 목표했던 대학교, 그리고 회사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한 규라였다.
마침내 책을 제대로 읽을 시간이 온 줄 알았지만 무리였다. 신입사원은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또 가장 늦게 회사를 나와야 했다.
어쩔 때는 청소를 위해 출근한 청소부 직원들과 마주할 때도 있었다. 지치고 피곤했다. 그런 순간에도 한 페이지의 책을 읽으며 힘을 다지는 규라였다.
“내가 사랑한 것을 나도 사랑하게 되었다.”
책의 한 문장, 한 소절을 읽으면서 퇴근하는 규라였다. 오늘은 그나마 일찍 퇴근한 편이었다. 시계바늘은 어느새 기지개를 펴며 10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
내일은 다시 일찍 출근을 해야 했지만, 규라는 책을 통해 위로를 얻었다. 문득 이렇게 사려고 지금까지 그런 노력들을 해왔던 걸까? 앞으로는 어떤 노력들을 더 해야 하는 걸까? 책을 읽고 음미하는 시간마저 빼앗겨 버린 시간이 야속했다.
요즘은 서책보다 웹소설이 유행하고 있었다. 규라는 바쁜 일상 속에 왜 그럴 수밖에 없게 된 건지 몸으로 체감이 됐다.
“음미할 시간이 없잖아.”
규라도 친구와 회사 동료들이 보는 웹소설을 추천 받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서책을 찾지 않고 웹소설을 보게 된 이유는, 웹소설은 쉽게 읽을 수 있게 쓰였기 때문이었다
가끔 어려운 웹소설도 있었고 서책만큼이나 문학적인 웹소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웹소설이라고 해도 질문으로 끝나버리는 서책과는 다르게 그래도 독자 중심적으로 풀이까지 알아서 해주는 편이었다.
“웹소설도 좋지.”
규라는 딱히 웹소설과 서책의 난이도와 레벨을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둘 다 작가가 열심히 쓴 글일 텐데 구분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생각했다.
“제대로 읽고 싶다.”
다만 지금은 웹 소설이든, 서책이든 제대로 읽어보고 음미하고 맛을 따라 희열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나 책에 집중할 만하면 회사에서 집에 도착했거나 반대로 회사로 도착한 시간이 되었다.
집에서는 온갖 정리들을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보였다. 빨래더미는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산처럼 쌓였고, 먼지는 마치 발이 달린 것처럼 어디든 금방 쌓였다.
크게 집중력을 쓰지 않아도 접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쇼츠와 릴스가 더 강한 짜릿함을 짧은 시간에 줄 수 있는 건 당연했다.
규라도 그런 매력을 모르는 건 아니나, 일부로 멀리했다. 다만 회사 내 회의에서도 밈이라고 하는 최신 트렌드가 쓰일 때가 있어서 꾸준히 최근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규라가 퇴근을 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분명 더 있을 텐데, 규라의 기억속에 정각으로 퇴근한 시간이었다.
“6시..”
이 시간에 퇴근한 게 얼마만인지, 첫 입사했을 때도 눈치를 보다가 7시인가, 좀 넘어서 퇴근을 했던 걸 떠올리는 규라였다.
그때 눈치 없이 사무실에 자리하고 있다가 회식으로 글려갈 뻔 한 걸, 신입사원을 배려한 선배 덕분에 잡혀가지 않을 수 있었다.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정각에 퇴근했을 때가.
“가서 책이나 읽어야지.”
그동안 자신이 쌓아놓았던 읽을 목록을 보았다. 쌓이는 책은 많은데 읽은 건 별로 없었다. 아마 이 속도라면 평생을 읽어도 다 못 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고민인 규라였다. 이 시간대에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매일 아침만 사람이 많은 걸 체험했던 규라였다. 이후에는 퇴근에는 그래도 인산인해의 모습은 아니었다.
근데 그 중 한 명이 갑자기 내렸다.
규라는 여기서 내리는 구나 싶었는데 그가 규라의 앞에 섰다. 마치 규라를 알아본 것처럼 행동했다.
“규라 맞지?”
“어?”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남자의 모습을 규라는 알지 못했다. 누구지? 싶었다.
“나, 선호야 선호. 기억 안나? 여신의 시선?”
여신의 시선. 규라의 기억 속 어딘 가에 자리 잡고 있었던 무언가였다. 한 번에 떠오르지 않다가 자신이 고등학교 때 만들었던 독서모임을 떠올렸다. 벌써 강산이 변할 정도로 변한 시간대 저 편속에서 변하지 않는 기억이 된 채 머무른 추억이었다.
“어..?”
“여전하구나. 여신 신규라.”
그랬던 날들이 있었다. 누군가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던 규라였다. 그런 규라가 지금은 회사에 취직한 채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그것도 모자라 동서남북으로 채이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 선호..?”
“설마, 나 기억 못하는거야?”
선호의 말을 듣고 갑자기 짜증이 나는 규라였다. 오늘 혼났던 내용 중에 선배에게 ‘설마 기억 못하는 거야?’가 오버랩 돼서였다.
“뭐, 그럴 수 있지.”
규라의 표정을 보고 바로 태세전환을 하는 선호였다.
“그래도, 서운하네. 아닌가 서운하면 안 되나. 그래도 이렇게 보니까 반갑다.”
규라는 난처했다. 선호가 규라를 보면서 반가워하고 있었지만 규라는 자신의 집을 보면서, 편안한 휴식처를 보면서 반가워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으면 술이나, 아니 차라도 한 잔 할래? 저녁 시간인데 저녁은 먹었어?”
고등학교 동창을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장소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몸은 얼른 집에 가서 눕자라고 말하는 규라였지만, 오늘만큼은 몸이 아닌 마음이 하는대로 하고 싶어 진 규라였다.
“술, 좋아. 마시자.”
그렇게 선호와 술자리를 가지게 된 규라였다. 선호는 규라가 보이지 않는, 여신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주먹을 꽉 지며, 2002년 월드컵에서 박지성의 골을 보며 어퍼컷을 날리며 환호했던 제스처를 재현했다.
그렇게 술자리를 찾는데, 항상 회식장소 술자리만 찾았던 규라에게 단 둘이 먹어야 하는 곳은 어딜 까 생각했다.
그때 선호는 규라에게 술자리 장소를 여러가지 제안했다.
“어떤 술 좋아해? 소주? 맥주? 와인도 좋아하나?”
“나는 뭐, 회식 때만 겨우 먹어서.”
선호는 규라가 술 맛을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면 여신에겐 어울리지 않을 수가 있는데. 술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잇는 데가 있는데.”
술 맛이라, 규라는 항상 자신이 술을 잘 마시지 않는 걸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언제나 술을 마실 시간, 뒤풀이를 자율적으로 참석하는 의사가 있으면 술 맛이 아닌, 독서의 맛을 느끼러 떠났던 규라였기 때문이었다.
“어딘데? 거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놓아버리면, 그건 평생 경험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남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한순간이라도 이해하려고 하면, 조각이나마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선호가 규라를 데려간 곳은 포장마차였다. 포장마차에서 어묵에다가 소주 1병을 시켰다.
“원래 든든하게 저녁을 먹고, 2차로 오는 게 맞긴 한데.”
규라한테 중간에 밥을 먹을까 넌지시 물어봤지만, 술 마시자며? 라는 대답에 바로 포장마차로 온 선호였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반갑습니다. 여신님.”
“그놈의 여신. 여신. 그만해.”
“여신 보고 여신이라고 부르는데, 왜 그만하라고 하십니까.”
“나 간다?”
“알았어, 그만할 게.”
선호의 장난에 규라도 잊혔던 기억의 파편속에서 선호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모자이크가 되어 있어서 완벽히는 아니었지만, 여신의 시선이라는 동아리 속의 선호가 있었다.
그는 이미 아는 규라와 다르게 모든 걸 알려고 하는 천방지축의 성격을 가진 남자 아이였다.
동아리원 중 유일하게 규라에게 관심이 있어서 온 게 아닌 남학생이기도 했다. 그래서 규라가 가장 골칫거리로 여기던 존재이기도 했다. 책을 선정하려고 하면, 선호가 꺼낼 왜? 라는 질문을 미리 준비해놓을 정도였다. 규라에게는 그 시간이 꽤 도움이 됐었다.
“나한테 넌 정말 여신이었어.”
유일하게 규라에게 반하지 않은 남자애였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그런 선호의 말에 궁금증이 든 규라였다.
“내가 질문하면, 넌 그걸 마치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마냥, 다 알고 있었거든? 좋았지 그 시간.”
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호의 왜를 준비했던 시간이 자신에게도 바람으로 흘러 스쳐왔다. 그 시간이 떠올라 잠깐의 미소를 보이는 규라였다.
“대단했지. 그때의 신규라는.”
“그랬나. 지금의 나는”
규라가 약한 말을 꺼내려는 때 선호가 그 말을 가로 막았다.
“지금도 대단하지. 여전히 예쁘고. 또 보니까 가방에 책도 그대로 들고 있네.”
규라와 선호가 우연히 만났을 때. 책을 들고 있는 규라였다. 그런 규라를 보고, 고등학교 때 여신이라 불렸던 애 생각나네 했던 선호였다. 그런데 그 규라였다. 분명히 그 규라였다! 그래서 바로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널 다시 보게 되면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거든.”
“고맙다고...?”
“나 출판사 다니잖아. 덕분에.”
선호의 말에 규라는 망치로 머리를 때려 맞은 느낌이 들었다.
통증은 없었지만 아프면서도 아린 느낌이었다.
“나름 베스트 셀러도 내가 기획했다. 다 규라 너 덕분이지. 안 그러면 내가 책을 가까이 두고 살았을까? 평생 책이란 인연이 있었을 까 싶어.”
처음 여신의 시선 독서모임에 들게 된 건 하도 남자애들이 떠들어대시었다. 게임하자고 했더니 독서모임 면접을 준비해야 한다고 거절하지 않나, 그래서 홧김에 지원신청서를 냈던 선호였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그 시선이, 여신의 시선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거지.”
문득 규라는 가슴 한구석에 숨겨둔 꿈을 찾았다.
심장이 뛰었다.
선호의 말 한마디에 독서모임을 꾸준히 하면서, 나중엔 여신의 시선이라는 서점을 차리는 규라의 오랜 꿈이 다시 수면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천공의 섬 라퓨타처럼 하늘 높이 솟아올라 우주로 가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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